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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자본주의 비판과 분석

자본이란 무엇인가?

  • 자본이란 일종의 사물(화폐나 기계 따위)일 뿐 아니라 일종의 사회관계, 특히 생산관계이기도 하다.
  • 자본은 ‘축적’이요 ‘축적된 노동’이다(마르크스는 자본을 ‘죽은 노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론, 축적된 노동은 사회주의를 비롯한 모든 생산 체제에서 필요하다. 축적된 노동은 특정한 사회관계에서만 자본이 된다.
  1. 축적된 노동이 가치를 늘리는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산 노동력과 교환될 수 있을 때 축적된 노동은 자본이 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려면,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해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사람들로 이뤄지는 계급이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자본에는 임금노동이 반드시 뒤따른다.
  2. 자본은 다수 자본들로만, 다시 말해 따로 움직이며 서로 경쟁하는 생산 단위들로만 존재할 수 있다.

생산을 위한 생산, 축적을 위한 축적.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동력이다.
사유재산은 부차적 문제다. 사유재산이 자본주의 발전의 전형적 형태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에서 분리돼 있고, 생산 수단을 지배하는 소수가 경쟁 때문에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가치를 증대 시키지 않을 수 없도록 압박을 받는 한, 자본과 자본주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란 노동자들의 산 노동이 축적된 노동을 늘리는 수단 노릇밖에 못 하는 체제다.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한다. 사회주의는 사회적 소유와 노동자들의 생산수단 통제를 통해 이 관계를 뒤집어 놓을 것이다. 죽은 노동은 산 노동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윤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필요를 위한 생산이 이뤄질 것이다.

  • 자본은 다른 자본들과의 경쟁에서 그 가치를 증식할 목적으로 임금노동을 착취하는 데 사용되는 축적된 부다.


노동자들은 어떻게 착취당할까?

  • 착취 때문에 계급이 생겨나고 착취가 계급투쟁에 영향을 미친다.

자본가들은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전에도 일자리가 있었고, 자본주의가 끝난 뒤에도 일자리는 있을 것이다. 일자리, 다시 말해 수행을 요하는 직무들은 인간의 필요에서 비롯하는 것이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65억 명의 인구는 모두 의식주와 교육 등등이 필요하므로 65억 명이 할 일은 절대 부족하지 않다. 자본가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지배해서 대다수 사람들이 자본가들 자신을 위한 일 외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도 자비심이나 시민적 의무 때문이 아니라 이윤을 얻으려고, 즉 그들이 가진 자본의 가치를 증식하기 위해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일할 능력, 즉 노동력도 다른 여느 상품과 마찬가지로 상품으로 사고 팔린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가치는 가겨과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의 가격은 가치를 기준으로 오르내린다)가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했다. (노동가치론)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도 그 노동력을 생산하는 데, 즉 노동자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그 노동자를 돌보고 먹이고 입히고 훈련하는 등등을 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노동력이 다른 여느 상품과 마찬가지로 사고팔리더라도, 노동력은 [가치를] 창조한다. 즉, 생산과정에 투입된 노동력은 노동력 생산에 필요한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한다. 마르크스가 잉여가치라고 부른 그 차이는 자본가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모든 이윤의 궁극적 원천이 된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그것은 임금노동에 대한 자본가의 견해의 이데올로기적·자기본위적 본질을 들춰내고,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 법칙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잉여가치론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이해관계의 직접적 충돌이 자본주의 생산의 핵심임도 보여 준다.

임금 수준이 높을수록 이윤 수준은 낮아진다. 따라서 임금과 이윤은

서로 반비례한다. 자본의 몫인 이윤은 노동의 몫인 임금이 하락하는 것과 같은 비율로 상승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윤은 임금이 하락하는 만큼 상승하고, 임금이 상승하는 만큼 하락한다. … 자본의 이해관계와 임금노동의 이해관계는 정면으로 대립한다(마르크스, 《임금노동과 자본》).

이것은 마르크스의 착취 이론이 어떻게 그의 계급·계급투쟁 이론을 뒷받침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그들(지배자)은 자본주의를 인간의 특성, 즉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인간 만큼 오래된 ‘탐욕’이나 약 5000년 전에 출현한 ‘화폐’나 약 1만 년 전에 출현한 ‘사유재산’과 동일시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많은 지적 성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역사적으로 어떻게 출현했고,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근본 동역학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분석했다는 것이다.

  • 자본주의는 어떤 태도나 관념이 아니라 특정한 경제체제, 즉 생산을 조직하는 특정한 방식이다.
  • 자본주의는 과거에도 상품생산 체제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상품은 시장에서 판매하려고 생산한 제품이다).
  • 자본주의 체제를 지배하는 것은 자본이다(그래서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 자본은 다른 자본들과의 경쟁에서 그 가치를 증식할 목적으로 임금노동을 착취하는 데 사용되는 축적된 부다.
  •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는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근본적 사회관계다.

자본주의는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 경제적으로 발전해야 했을 뿐 아니라 자본 소유자들(자본가들, 즉 부르주아지)이 정치권력도 장악해야 했다.

자본주의는 왜 봉건제보다 진보적인 체제인가?

  1. 임금노동은 그에 앞선 노예·농노·농민의 노동보다 진보였다(인간의 자유, 생산성, 혁명적 잠재력이라는 측면에서).
  2. 자본가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경쟁하기 때문에 과거의 봉건영주나 다른 지배자들이 통치할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규모로 생산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일반화한 상품 생산 체제의 발전 때문에 이제는 모든 것을 사고 파는 세상이 됐다. 노동력도 상품이 되다 보니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에서, 그리고 자신이 노동해 만든 생산물에서 소외된다. 그 때문에 노동은 무의미한 고역이 되고 노동자들은 기계(와 사무실)의 부속품이 된다. 자본에 의한 임금 고용은 착취 과정이고, 그 때문에 노동자들은 기력이 쇠하고 불평등은 더 심해진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오해 두 가지는 자본주의를 사적 소유와 동일시 하거나 자유 시장과 동일시한 것이었다. 두 경우 모두 체제의 중요하고 때로는 유력한 특징 하나를 체제의 본질 자체와 동일시 한 것이 오류였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국가가 국가 소유와 국가 계획을 확대하면 자본주의를 점차 폐지하거나 적어도 길들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틀렸다. 그 결과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혼합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의 혼합이었을 뿐이다.

결국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노동자들 스스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생산과정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부르주아지가 했듯이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자본주의의 사슬은 그 사슬이 벼려지는 곳에서 끊어져야 한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경제위기를 낳는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실업을 설명할 때 자본주의 생산은 이윤을 위한 생산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윤을 올리는 데 어떻게든 도움이 될 때만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이윤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은 언제든 일자리에서 쫓겨난다.
따라서 어떤 시기의 전반적 고용수준은 당시 산업 전반의 평균이윤율이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경제가 호활으로 갈지 불황으로 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1. 주기성: 이 과정은 호황과 불황이 거의 규칙적으로 반복되게 한다. 호황 때는 노동력 수요가 늘어나므로 노동자들은 이윤이 줄어들 정도까지 임금을 끌어올릴 수 있다. 그러면 이윤율이 떨어지고 호황은 불황으로 바뀐다. 불황 때는 실헙 때문에 노동자들의 교섭력이 약해져서 임금은 떨어지고, 결국 이윤율이 회복된다. 불황은 다시 호황으로 바뀐다.
  2. 이윤율의 장기적 저하 경향: 이 과정이 더 근본적이다. 자본주의는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자본가들은 저마다 되도록 생산을 더 늘리고 시장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착취를 바탕으로 하므로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생산한 재화를 모두 구입할 만한 임금을 주는 법이 없다. 그러다 보니 자본주의에는 언제나 과잉생산이라는 위험이 따라다닌다. 팔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생산할 위험 말이다.

이윤은 기계류로 대표되는 축적된 노동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의 산 노동에서만 생긴다. 자본가들이 기계류를 점점 더 많이 사들일수록, 산 노동이 자본가의 지출에서 차지하는 몫은 상대적으로 점점 더 적어질 수밖에 없다(컴퓨터 덕분에 예전에는 몇 사람이 하던 일을 한 사람이 할 수 있게 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에는 이런 일이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면 이윤율(자본가의 총지출과 비교한 이윤량)은 떨어진다.

일단 이윤율이 어느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자본가들은 투자 의욕을 잃게 되고, 생산수단이 팔리지 않으면서 체계는 과잉생산이라는 위기를 맞는다.

물론 이윤율 하락을 벌충하는 요인도 여럿 있다. 예컨대 전쟁으로 막대한 자본이 파괴된다든지, 평화로운 시기에도 언제나 군비 지출 규모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한다든지 하면 얼마 동안은 노동력보다 자본이 지나치게 많아지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 또, 1970년대부터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은 신흥공업국으로 자본수출을 늘려 왔다. 그러다 보니 그 나라들 안에는 투자할 자본이 줄어들어, 그만큼 과잉생산이 완화돼 왔다.

오늘날에는 자본의 단위가 과거에 비해 규모와 집중도가 훨씬 커져, 파산도 쉬운 일이 아니다.
-> 자본의 집적과 집중

자본이 집중돼 요즘처럼 자동차 제조업체가 두세 개의 거대 기업밖에 없을 때는, 그 기업이 무너지면 경제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게 된다.

이윤율이 떨어지는 경향은 자본주의의 밑바탕에 깔린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인류의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게 됐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대량 실업은 이윤 추구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체제의 본성 자체에 깃든 모순 때문에 생긴다.


경제 위기에 대한 몇 가지 단상

  •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를 추구해 온 조지 부시의 우파 정부가 모기지 업체인 프레디맥과 페미메이를 인수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국유화를 단행한 데 이어 일련의 국유와 조처들을 실행함 -> 물론 이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일 뿐이다.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 다만 이해하라!” - 스피노자

  1. 지금의 (경제) 위기는 자연재해나 기후 재앙이 아니다. 이 위기는 순전히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다.
  2. 이 위기는 근본적으로 신뢰성의 위기가 아니다.
    -> 자본주의 언론과 평론가들은 항상 이런 위기가 근본적으로 투자자들, 투기꾼들, 심지어 제조업자들의 신뢰도 문제라고 주장하려 한다. 때때로 그들은 “기초적 실물경제는 건전하다”는 진부한 말로 교묘히 빠져나가려 한다.
  • 마르크스의 경제학이 이룬 큰 성과 하나는 모든 부의 창출이 궁극적으로 자연을 이용해 노동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과 모든 가치가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지출에 달려 있음을 입증하려 했다는 점이다.
  • 은행의 과잉 대출은 호황기에 과잉 생산이 나타나는 일반적 경향의 변형일 뿐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 다시 말해, 자본의 집중과 세계경제 통합의 정도가 엄청나게 증대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원료와 공산품의 국제 운송과 판매가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뜻이 아니라 개별 상품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국제적 과정이 됐다는 뜻이다.

  1. 사회의 기본적 생산관계가 변하지 않았다. 주요 생산력은 여전히 극소수가 소유·지배한다. 그들은 노동력을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을 바탕으로 자기들끼리 서로 경쟁한다. 직접생산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노동과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돼 있다.
  2. 체제의 근본적 동역학도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중국이나 산업혁명기의 영국이나 체제의 근본적 동역학은 똑같다. 즉,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이윤이 먼저인 자본축적 드라이브가 그것이다.

생활수준 향상, 그러나

생활수준의 향상이 실질적인 것도 사실이지만 엄청나게 불균등한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평균수명을 다시 거론하자면, 앙골라가 37세, 모잠비크가 40세, 남아프리카공화국이 42.5세다. 또, 국가 간 불평등과 국내의 불평등이 모두 심화하고 있다. 1980년 미국에서 기업 최고경영자의 보수는 생산직 노동자의 42배였는데 2000년에는 525배였다! 1998년 유엔개발계획(UNDP) 보고서를 보면, 세계 최고 부자 225명의 재산을 모두 합친 금액 1조 달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 25억 명의 연간 소득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었다. 또, 세계 최고 갑부 세 명의 재산이 48개 최빈국의 국내총생산(GDP)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정확히 예측했듯이, 자본주의의 국제적 ‘승리’처럼 보이는 것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 즉 국제 노동계급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지리적으로도 확산되고 점차 성장하는 거대 도시들로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가 강조했듯이,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하고 발전하는 체제다. “부르주아지는 생산도구를, 그래서 생산관계를 끊임없이 혁신하지 않고는, 그와 함께 사회관계 전체를 끊임없이 혁신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 생산의 끊임없는 혁신, 모든 사회 조건의 끊임없는 교란이 … 부르주아의 시대를 다른 모든 시대와 구분 짓는 특징이다.”

레닌의 《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근 단계》(1916)

  1. 자본의 독점이 자본주의적 자유경쟁을 대체하고, 거대 독점기업·카르텔·트러스트 등이 경제생활을 지배한다.
  2.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이 융합해 ‘금융자본’이 되고, 금융과두제가 출현한다.
  3. 상품 수출(그 전 단계의 자본주의의 전형적 특징이었던)이 자본 수출로 바뀌고, 특히 자본 부족과 값싼 노동력·토지·원료 때문에 이윤율이 높은 경제적 후진국들로 자본이 수출된다.
  4. 국제 독점자본들이 형성돼, 세계 전역에서 영업하며 자기들끼리 세계를 분할한다.
  5. 이런 경제적 분할과 함께, 거대 열강들 사이의 세계 영토 분할도 완료된다. 따라서 또 다른 확장, 또 다른 식민지 병합은 오직 강압적 세계 재분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평화’는 모두 새로운 전쟁 전의 일시적 ‘휴전’일 뿐이다. 진정한 평화는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전복해야만 찾아올 것이다.

  • 카우츠키: 제국주의가 각별히 친제국주의적인 자본가들의 영향력 아래 채택된 ‘정책’일 뿐이라고 주장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자체의 경제적 필연이 아니다.) -> 자본주의가 머지않아 ‘초제국주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고, 아니 거의 그럴 것이라고 주장했다. ‘초제국주의’단계에서는 서로 경쟁하는 독점기업끼리, 국가들끼리 서로 싸우거나 충돌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합의·협력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 레닌은 그런 견해가 제국주의의 정치와 경제를 완전히 분리해서 본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틀렸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모순이 없는 비제국주의적이고 평화로운 자본주의가 가능하다는 환상을 부추겨, 전쟁·제국주의·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무디게 만들고 기회주의·개혁주의·계급협력 노선으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정치적 재앙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레닌과 피억압 민족 자결권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경제적 분석은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에 대한 그의 정치적 견해라는 맥락 속에서도 봐야 한다. 레닌은 억압 민족인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피억압 민족이 원한다면 분리할 권리도 옹호해야 할 절대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이를 바탕으로 해서만 노동계급이 국제적으로 단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계의 피억압 민족·국민과 노동계급 사이의 국제적 동맹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물론 독자적인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오늘날) 저개발국으로의 자본 수출 같은 요소들은 적절하지 않게 된 반면,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조한 요소들, 예컨대 부하린이 지적한 국가와 자본의 결탁은 훨씬 더 적절해졌다.


전쟁은 왜 일어날까?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와 기후변화


흉악범죄와 자본주의


인구 ‘과잉’